[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남편 살리려 허벅지 베어낸 `열녀` 이야기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남편 살리려 허벅지 베어낸 `열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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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흘린 아내들의 슬픈 기록 손병희 딸 "눈 뜨라"며 단지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돌봄이 필요한 상황에서 '배우자가 자신을 돌봐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남성의 비율은 49%로, 여성(22%)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다. 이러한 성별 간 인식 격차는 오랜 시간 축적된 성 역할 고정관념의 반영일 수 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당시 신문에는 남편의 병을 낫게 하겠다며 자신의 허벅지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른바 할고(割股; 허벅지의 살을 베어 냄)와 단지(斷指; 손가락을 자름)다. 이러한 행위는 '열녀'나 '효부'라는 미명 아래 미화되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여성에만 희생을 기대하는 구조는 아직도 여전한 듯 하다.
"전남 곡성군 겸면 아파트후순위대출
마전리 이기영(李基永)의 장남이 우연히 병을 얻어 백약이 무효함에 그 처 진(陳)씨는 당년 20세라. 그 남편의 병을 완치하고자 하여 작년 9월경에 할고하여 남편에게 먹이고, 10월경에 할장육(割掌肉; 손바닥을 자른 고기)과 단지하여 그 피를 남편에게 먹였으나 효과가 없이 11월 말경에 병이 더욱 심해서 목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름에 또 단지하여 그 피를 입인터넷대출신청
에 넣었으니, 남편은 결국 죽고 3일을 음식과 물을 전폐하고 통곡하더니, 죽기를 맹세하니 그 부모가 누누이 설득하기를 부모가 살아 있거늘 너 역시 남편을 따라 죽으면 불효라 하였으나, 순종(殉從)하니 이와 같은 열녀효부는 세상에 드물다 할지다." (1921년 2월 6일자 매일신보)
"대구부 동운정 82번지 유덕룡(兪德龍)의 처 박봉금(朴鳳자동차할부대출
今)이라는 금년 23세된 여자는, 그 남편 유덕룡이가 불행히 풍병(風病; 중풍)이 들어 두문불출한 지가 벌써 여러 해 동안이 됨에, 박봉금이는 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마침내 조금도 효력이 없고, 점차 병세가 위중할 뿐이요 따라서 가세(家勢)는 적빈(赤貧; 몹시 가난함)하여 의약도 마음대로 쓰지 못함을 주소(晝宵; 밤낮)로 근심하던 바,일산농협대학
사람의 고기를 먹이면 즉효(卽效)가 있다는 말을 듣고, 지난 음력 5월 17일에 자기의 왼편 다리를 2치 가량이나 베어서 가늘게 회를 쳐서 그 남편에게 먹였던바, 유덕룡이는 이것을 먹은 후 다소간의 효력이 있어 이제는 문 밖 출입을 하게 되었으니, 박씨의 열성은 하늘이 감동한 바라고 그곳 인사들의 찬성(讚聲; 칭찬의 소리)이 자자하고, 그 이웃 사람들은 빌라주택담보대출
그 베인 다리 치료비로 몇 원씩의 보조를 하였다더라." (1921년 8월 6일자 매일신보)
계속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잔혹한 모습을 더 들여다 보자. "경남 삼천포 동리 김형수(金馨洙·34)는 신병(身病)으로 신음한 지 수 년이라. 그의 처 강씨(姜氏·33)와 그 아우 김덕수(金德洙·23)는 이후 장구한 세월을 하루같이 간호하교사급여압류
던 바 약석(藥石)의 효험이 없이 병세가 점점 위중해져서 지난달 23일에 이르러 그만 절명하려 하므로, 그 아우 김덕수는 급히 식도로써 넓적다리 살을 베어 선혈(鮮血)을 그 형의 운명하려는 입에 떨어트렸더니 절명되였던 그 형은 곧 회생되어 10여 시간을 지나 그 이튿날 오후에 또 운명하려 하므로 그 처 강씨는 왼손 무명지를 단지하여 그 피를 흘려 넣었더니 신차 할부 조건
다시 한 주야(晝夜)를 회생하였다가 천명을 어찌하지 못하여 27일에 필경 사망하였는데, 부근 인사들은 김덕수의 우애와 강씨의 열행(烈行)을 모두 칭찬하며 그곳 청년회에서도 표창을 하리라더라." (1922년 10월 3일자 동아일보)
"전북 김제군 김제면 검산리 561번지 강일영(姜日榮·31)은 작년 12월부터 폐병으로 신음하던 중 백약(百藥200만원 대출
)이 무효하고 지난 16일 오후 11시에는 인사(人事)를 불성(不省)하고 절명하므로, 그 처 강성녀(姜姓女·33)는 왼편 다리를 베어 그 피로 죽어가는 남편의 입에다 흘려 넣었더니 다행히 그는 회생한 바, 집안은 다시 웃음의 가정을 이루었더니 그는 불행히 하루를 더 살고 그 이튿날 즉 17일 오후 8시에 드디어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더라." (1925년활용
5월 27일자 조선일보)
임산부까지도 제 몸을 돌보지 않고 할고한 기사도 눈에 띈다. "폐병으로 죽게 된 남편을 위하여 할고를 한 여자가 있다. 천도교 제2세 교주 최해월(崔海月) 선생의 둘째 아들 동호(東鎬·28)는 연전(年前; 몇 해 전) 독립운동 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서 3년 동안 철창생활을 하고 나온 후, 우연히 폐병에 걸려 오랫동우리은행 근로자전세자금대출
안 신음 중이더니, 지금부터 10여 일 전에는 병세가 위급하게 되었음으로, 이 급보를 들은 그의 아내 오순화(吳順嬅·26)는 즉시 칼로 왼편 넓적다리를 베어 선혈이 흥건한 자기의 고기를 싸서 들고 그 길로 집을 떠나, 10리나 되는 정거장까지 피를 흘리며 걸어 나와 차를 타고 경성에 이르러, 그 남편이 병을 치료하는 동대문 밖 상춘원에 이르러 자기의 고기를 삶아서 생명이 위태한 남편에게 먹였는데, 불행히 그 남편 최동호씨는 지난 21일 오전 9시에 사랑하는 아내도 저버리고 세상을 떠났다 하며, 오(吳)씨는 방금 치료 중인데 마침 산삭(産朔; 해산달)임을 불구하고 그와 같이 할고를 하였으므로 피가 많이 나와서 생명을 염려하였으나, 다행히 치료만 잘하면 관계 없겠다더라." (1923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선생에게도 이런 일은 있었다. "지난 5월 10일 밤부터 신병이 심해져서 동대문밖 상춘원 별장에서 치료 중인 천도교 3세 교주 손병희씨의 병세는 17일 하오에 이르러 폐렴 증세가 더욱 심하여 18일 오전 1시에는 아주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음으로 최후의 수단으로 식염 주사를 하여 겨우 맥이 통하는 동시에 어제 오전 중에는 그대로 혼수상태가 계속 되었는데, 하오 1시가 됨에 주치의 박종환(朴宗桓)씨는 병세의 위급함을 말하고 가까이에서 돌보는 사람을 불렀다. 친척이 병실에 모여 이제는 최후라 하여 냉수를 흘려 넣으며 의사는 한편으로 청진기를 대고 맥을 보는 동안에, 시간은 꼭 하오 1시 20분인데, '아버지 눈 좀 뜨세요'하는 여인의 소리가 들리며 손씨의 둘째 딸 광화(廣嬅·36)씨가 미리 준비한 식칼로 왼쪽 손 무명지를 찍어서 더운 피를 그 부친의 입에 흘리었다. 실내는 비참한 공기에 쌓이고 모든 사람은 비감한 눈물을 흘리는데, 거의 절명되었던 손씨는 약 5분을 지나서 감았던 눈을 다시 뜨므로, 일동은 반기어서 다시 약물과 냉수를 흘려 넣음에, 하늘이 도왔다 할는지 다시 맥이 돌기를 시작하여 하오 2시까지는 전과 같이 혼수상태를 계속하였는데, 병세는 이미 절망에 빠져 다시는 어찌 할 수 없이 된 모양이라더라." (1922년 5월 19일자 동아일보)